Man of Action 전 WHO 이종욱 사무총장 - #
이다지도 훌륭한 분을 참 늦게 알았네요.
앞으로 적어둘 글들은 여기 저기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그분의 신화 같은 이야기들이지만, 우연찮게 인터넷에서 일게 된 그분의 업적과 기적과도 같은 신념이 절 준엄하게 꾸짖어주네요.
한번도 만나 뵌 적도 없고, 한국인으로 자랑스럽게 UN산하기구의 첫 수장이었다는 타이틀이 부러운 것도 아닌, 오직 신념 하나로 돌아가신 뒤에도 저 같은 사람에게도 단지 그분이 세상을 살다 가셨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깨달음을 주신 분이네요.
너무 늦게 알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이 이야기는 이종욱 사무총장님의 이야기입니다.
전 WHO이종욱 사무총장 국제기관단체인, 의사
출생-사망 1945년 4월 12일 - 2006년 5월 22일
가족 동생 이종오, 이종구
학력 하와이대학교 대학원 전염병학 석사
수상 2010년 세계한센포럼 한센공로상 제1회 한미 자랑스러운 의사상
경력 2003.05~2006.05 제6대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2003 세계보건기구(WHO) 결핵국 국장
감동받은 이분의 일대기를 퍼와서 붙여 넣으려다가, 이런 분에 관련된 글을 한 글자 정도도 내 손으로 옮겨 적지 못한다면, 이런 분을 소개하는 것 자체가 이분께 누가 되는 행동 같아. 간략하게나마 정리 해볼까 합니다.
위의 약력에 보다시피 하와이 대학교 대학원 전염병 석사라고 되어 있지만, 이종욱선생님은 1976년 서울대 공대를 이미 졸업하셨던 공학도셨다. 하지만 이종욱선생님은 다시 서울대 의대에 진학하셨는데, 한국의 70년대는 한창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대이니 서울대 공대라는 스펙만으로 출세는 보장되어 있었던 셈인데도, 다시 그런 스펙을 버리고 의대를 진학하시고 봉사하는 삶을 택하셨다고 한다.
동남아 AI조사를 함께 다니던 미 보건장관이 이종욱 선생님께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왜 굳이 봉사하는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종욱 선생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6.25전쟁 때 다섯 살이었어요. 어머니와 두 형제와 함께 서울에서 대구까지 60일동안 눈보라 속을 걸었지요. 그 때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연민을 느꼈어요."
고작 다섯 살의 나이였다.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그는 삶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인간 본연에 대한 연민을 느꼈고, 그 마음을 어른이 되도록 간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WHO에 입사한 이유는 봉사하는 삶의 실천의 연장선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입사 당시 WHO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단지 입사한 이유는 좋은 월급, 좋은 직책, 좋은 일자리라는 조건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숭고한 정신 없이 세가지 좋은 조건에 혹해서 입사한 것이다."
"나는 저 마음 깊이 그것이 얼마나 일하는 데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숭고한 정신을 가진 사람보다 더 대단한 힘으로 WHO에서 일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정신 보다 앞서 몸으로 자신의 힘을 표현하며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에 더 앞서 행동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일년에 30만 km를 비행했고, 365일 중 150일을 출장을 다녔다. 그는 출장을 다니면서 단 한번도 1등석으로 비행기를 타 본적이 없었고 언제나 2등석을 고집했으며, 누군가가 왜 항상 2등석만을 타느냐고 물으면 선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고 한다.
"가난한 나라가 낸 분담금도 있는데 그 돈으로 호강 할 수는 없어요"
강한 행동과 추진력을 가진 그는 wHO 본부 예방백신 사업국장 시절 소아마비 유병률을 세계인구 1만명당 1명이하로 떨어트렸고, 그 후 그는 백신의 황제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는 퍼온 글들입니다.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2009년 전세계를 강타했던 호흡기 질환이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WHO)의 보고에 따르면 2010년 4월 25일 현재 1만7천919명(25일 현재)으로 공식 집계됬습니다.
매년 미국에서만 겨울철 독감으로 2만~3만 명이 사망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인류가 '신종플루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셈이 됩니다.
인류의 선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 WHO 전 사무총장 이종욱입니다.
2005년 스위스 제네바의 WHO 본부 지하에는 새로운 비상상황실이 가동되었습니다.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그 상황을 시시각각 살피고 대응 계획을 세우기 위한 '전략보건작전센터'입니다.
조류 인플루엔자에 이은 신종 전염병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국제보건규칙을 개정한 당시 WHO 사무총장은
센터를 만든 데 이어 전염병이 퍼지는 정도에 따라 여섯 단계로 구분하고 단계에 맞는 대책을 마련하는
'WHO 대유행 단계'를 세웠습니다.
"WHO가 신형전염병의 위험을 지나치게 과장해 세계를 공포로 몰고 있다" 며 각국 언론으로부터 '양치기 소년'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었지만
"저의 경고는 나중에 희생자 숫자가 예상보다 적어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지금 사람들에게 그 위험성을 널리 알려
대비하도록 하기 위함" 이라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man of action'
그의 애칭처럼 그는 비판에 굴하지 않고 WHO의 판데믹 인플루엔자 대응 체제를 재편했습니다.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가 창궐하자 세계는 '타미플루를 비축하라'는 그의 충고를 기억해 냈으나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적어둘 글들은 여기 저기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그분의 신화 같은 이야기들이지만, 우연찮게 인터넷에서 일게 된 그분의 업적과 기적과도 같은 신념이 절 준엄하게 꾸짖어주네요.
한번도 만나 뵌 적도 없고, 한국인으로 자랑스럽게 UN산하기구의 첫 수장이었다는 타이틀이 부러운 것도 아닌, 오직 신념 하나로 돌아가신 뒤에도 저 같은 사람에게도 단지 그분이 세상을 살다 가셨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깨달음을 주신 분이네요.
너무 늦게 알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이 이야기는 이종욱 사무총장님의 이야기입니다.
전 WHO이종욱 사무총장 국제기관단체인, 의사
출생-사망 1945년 4월 12일 - 2006년 5월 22일
가족 동생 이종오, 이종구
학력 하와이대학교 대학원 전염병학 석사
수상 2010년 세계한센포럼 한센공로상 제1회 한미 자랑스러운 의사상
경력 2003.05~2006.05 제6대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2003 세계보건기구(WHO) 결핵국 국장
감동받은 이분의 일대기를 퍼와서 붙여 넣으려다가, 이런 분에 관련된 글을 한 글자 정도도 내 손으로 옮겨 적지 못한다면, 이런 분을 소개하는 것 자체가 이분께 누가 되는 행동 같아. 간략하게나마 정리 해볼까 합니다.
위의 약력에 보다시피 하와이 대학교 대학원 전염병 석사라고 되어 있지만, 이종욱선생님은 1976년 서울대 공대를 이미 졸업하셨던 공학도셨다. 하지만 이종욱선생님은 다시 서울대 의대에 진학하셨는데, 한국의 70년대는 한창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대이니 서울대 공대라는 스펙만으로 출세는 보장되어 있었던 셈인데도, 다시 그런 스펙을 버리고 의대를 진학하시고 봉사하는 삶을 택하셨다고 한다.
동남아 AI조사를 함께 다니던 미 보건장관이 이종욱 선생님께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왜 굳이 봉사하는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종욱 선생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6.25전쟁 때 다섯 살이었어요. 어머니와 두 형제와 함께 서울에서 대구까지 60일동안 눈보라 속을 걸었지요. 그 때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연민을 느꼈어요."
고작 다섯 살의 나이였다.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그는 삶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인간 본연에 대한 연민을 느꼈고, 그 마음을 어른이 되도록 간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WHO에 입사한 이유는 봉사하는 삶의 실천의 연장선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입사 당시 WHO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단지 입사한 이유는 좋은 월급, 좋은 직책, 좋은 일자리라는 조건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숭고한 정신 없이 세가지 좋은 조건에 혹해서 입사한 것이다."
"나는 저 마음 깊이 그것이 얼마나 일하는 데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숭고한 정신을 가진 사람보다 더 대단한 힘으로 WHO에서 일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정신 보다 앞서 몸으로 자신의 힘을 표현하며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에 더 앞서 행동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일년에 30만 km를 비행했고, 365일 중 150일을 출장을 다녔다. 그는 출장을 다니면서 단 한번도 1등석으로 비행기를 타 본적이 없었고 언제나 2등석을 고집했으며, 누군가가 왜 항상 2등석만을 타느냐고 물으면 선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고 한다.
"가난한 나라가 낸 분담금도 있는데 그 돈으로 호강 할 수는 없어요"
강한 행동과 추진력을 가진 그는 wHO 본부 예방백신 사업국장 시절 소아마비 유병률을 세계인구 1만명당 1명이하로 떨어트렸고, 그 후 그는 백신의 황제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는 퍼온 글들입니다.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2009년 전세계를 강타했던 호흡기 질환이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WHO)의 보고에 따르면 2010년 4월 25일 현재 1만7천919명(25일 현재)으로 공식 집계됬습니다.
매년 미국에서만 겨울철 독감으로 2만~3만 명이 사망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인류가 '신종플루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셈이 됩니다.
인류의 선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 WHO 전 사무총장 이종욱입니다.
2005년 스위스 제네바의 WHO 본부 지하에는 새로운 비상상황실이 가동되었습니다.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그 상황을 시시각각 살피고 대응 계획을 세우기 위한 '전략보건작전센터'입니다.
조류 인플루엔자에 이은 신종 전염병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국제보건규칙을 개정한 당시 WHO 사무총장은
센터를 만든 데 이어 전염병이 퍼지는 정도에 따라 여섯 단계로 구분하고 단계에 맞는 대책을 마련하는
'WHO 대유행 단계'를 세웠습니다.
"WHO가 신형전염병의 위험을 지나치게 과장해 세계를 공포로 몰고 있다" 며 각국 언론으로부터 '양치기 소년'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었지만
"저의 경고는 나중에 희생자 숫자가 예상보다 적어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지금 사람들에게 그 위험성을 널리 알려
대비하도록 하기 위함" 이라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man of action'
그의 애칭처럼 그는 비판에 굴하지 않고 WHO의 판데믹 인플루엔자 대응 체제를 재편했습니다.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가 창궐하자 세계는 '타미플루를 비축하라'는 그의 충고를 기억해 냈으나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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